아무리 자신의 운을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동안 퍼다 썼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게임 운이 없을 줄은 예란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나 꾸준히, 열심히 게임에 참가했는데도 손에 넣은 페이지는 겨우 두 장이었다. 그나마도 김수하에게 공유 받은 페이지와 그 이후에 입수한 페이지가 같은 페이지였으니 운이 없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쯤 되면 슬슬 반칙을 써볼까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최후의 선택지로 매드해터를 이를 살살 구슬려보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지만 정작 모습을 드러낸 두 남자는 그녀가 본 적 없는 남자들이었다. 백선교 내에서 한 번이라도 마주쳤던 얼굴이었다면 적당히 구워삶아 볼 시도라도 해봤겠지만 전혀 모르는 이들이었기에 쉽사리 딜을 걸기도 껄끄러웠다.
괜히 잘못 찍혀 윗선에 말이라도 올라가면 귀찮아지는 것이다.
하기사 한 마디 상의 없이 멋대로 권유라에게 돈을 융통해줬다고 잔소리들은 마당에 뭐가 이쁘다고 이쪽의 편의를 봐주겠느냐마는.
그러고 보니 이번 참가자 중에도 그쪽 사람이 하나 껴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았지만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지를 못하니 거기에 비벼볼 여지도 없었다.
“아, 역시 얌전히 돈이나 대고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주워 먹다 손 뗄 걸 그랬나.”
수상한 종교 단체에 깊게 개입해서 좋을 것이야 없다. 허나 높으신 분들께 줄이 닿아있는 점에서, 전국구로 자신의 영역을 늘리고자 하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백선교에 투자를 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 마지못해 백선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물론 권유라의 일로 인해 백선교가 하고 있는 일 중 일부를 알게 된 것도 나름 소득이라면 소득이었지만, 이 일로 인해 백선교 내부에서 평판이 조금 나빠질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거야 나중에 생각할 일이겠지만.
"뭐, 나중에 가서 적당히 빌든가 해야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믿을 구석이 없으니 가장 그럴싸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곳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김수하 씨?”
열려 있는 문에 괜히 똑똑, 노크하며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아직 그의 룸메이트는 들어오지 않은 듯 방에는 그 혼자 있었다. 룸메이트가 오주운이라고 했던가. 어쩐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분위기의 남자로 기억하고 있다. 접점이 없어 보이는 그와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은 역시 무언가의 거래를 위함일까.
“강예란 씨. 무슨 일로?”
“뭐, 역시 ‘그거’죠.”
“그러고 보니 예란 씨는 오늘 운이 안 따라줬던 것 같군요.”
“그렇게 웃는 얼굴로 그런 말 하면 굉장히 짜증 나는데. 그래서, 여전히 내게 정보를 공유해줄 생각이 있어요?”
“일단은 협력 관계니까 요청하신다면 거절하진 않을 겁니다만.”
역시 이쪽에 받기로 한 것은 꽤 무난한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감사히 받기야 하겠는데. 질문하나 해도 돼요?”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짧은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예란은 몇 번인가 물어보려다 말았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대답을 할 지는 질문 먼저 들어보고 생각하죠.”
“난 그렇게 두뇌파가 아니라서 생각해봐도 답이 안 나오는데. 수하 씨는 나한테 아무것도 받는 것도 없으면서 왜 협력해주는 건지 모르겠네요. 당신은 매드해터의 게임 진행을 도와주면서까지 힌트 페이지를 빠짐없이 손에 넣었으니 굳이 나와 협력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몇 번이나 봤다고.”
고생할 필요도, 복잡하게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힌트를 얻어 볼 수 있다는 것은 몹시도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허나 그에 비해 예란이 수하에게 제공하는 것은 전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이 거래는 공평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거래가 아닌 일방적인 삥뜯기나 다름없음에도 수하는 딱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얘기한 적이 없었다.
“내가 여기서 수하 씨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어요. 권유라 씨가 복수를 위해 나에게 돈을 빌리고 갚았다는 금전거래 사실을 없애는 정도? 뭐, 그런 위장이야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게 그쪽 재판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나, 그쪽 재판 결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만 그 여자의 변호사인 당신에게 그나마 이득이 될 수 있는 일은 그거 말곤 그다지 생각도 안 나고.”
“지금 와서 그런 걸 묻는 이유는 뭡니까,예란 씨?”
“지금이니까 묻는 거예요. 아마 이번이 마지막 거래가 될 수도 있잖아요? 밖에 나가서도 웬만하면 안 마주치는 게 서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 좋지 않을까 싶은데.”
“하하, 혹시 누가 압니까. 제가 예란 씨 변호라도 맡게 될지.”
“사양할래요. 왠지 속 엄청 긁을 것 같아.”
그녀는 휘휘 손을 내저으며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이야기의 방향을 원점으로 되돌린다.
“아마 이렇게 여유 있게 얘기할만한 시간은 오늘 밤이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다른 대가를 받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말하시고. 아니면 공짜로 주시는 정보, 잘 받아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