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이 어울릴만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예란은 짐짓 농을 던져보았다.물론 딱히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눈앞의 젊은-젊다기보다는 어리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여자에게 파격적인 조건의 제안을 받은 지 어언1년 만의 재회였지만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곳은 삭막하기 그지없는 교도소 면회실.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수척해진 권유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이내 전날 관리받고 온 손톱으로 시선을 옮겼다.완벽한 아몬드 모양의 손톱 위에 곱게 발린 진홍색의 폴리시.
이런 곳에 들어온다면 이 사소한 꾸밈조차도 먼 나라 이야기가 되겠지.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한다면 유라 옆에 나란히 들어앉아 있어도 모자람이 없을 테지만-혹은 더욱 긴 시간을 있어야 하겠지만 그럴 일은 영영 없으리라고 예란은 자신했다.
“그래서,결과는 만족스러워?”
“...약속은 곧 지킬게요.이래저래 휴가가 밀려서 찾아가질 못했네요,계좌라도 알려주고 가지 그래요?”
“반쯤 못 받겠다 싶었으니까 별로 상관은 없는데.”
“그쪽 사람치곤 꽤 관대하시네요.”
“회사 돈도 아니고 내 사재였으니까.뭐 유라 씨가 어디까지 하는지 궁금했어.”
유난히 손님이 없어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날.
예란의 회사 집무실로 찾아와 돈을 융통해달라던 유라가 내민 것은 보험 계약서였다.보험금 수령인 정보를 적는 부분만 비어있는 종이를 훑어보고 나서 예란은 바로 알았다.그녀가 계약 조건으로 무엇을 걸고자 하는지.
장소 섭외라던가 일을 꾸미는 데에 드는 일체의 지원은 백선교의 특기요 취미니 굳이 그녀가 예란을 찾아와야 할 이유는 없었다.그럼에도 그녀는 백선교의 개입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최악과 차악 중 차악을 선택한 건가.그렇게 이해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백선교보다 질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또한, ‘복수’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권유라 자체에 흥미가 생겼다.이미 복수를 끝낸 입장에서 타인의 복수를 지켜보는 입장이 되기란 쉽게 얻을 기회는 아니다.
“몇 년이나 받았어?”
“글쎄요,지은 죄에 비해선 가벼우려나.”
태도를 보아하니 법정에서도 그다지 다르게 행동하진 않았을 것이 눈에 선했다.패기인지 포기인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저 시절의 나는 어땠더라.기억도 안 나네.
“뭐 어쨌거나,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와서 갈 데가 없거든 우리 회사로 와.이것도 인연이라고 밥벌이 정도는 시켜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고맙지만 거절하죠.별로 그쪽 사람들이랑 더 엮이고 싶지도 않고.갚을 건 알아서 갚을 테니 걱정말구요.”
“걱정해줄 때 받는 게 좋아,권유라 씨.그렇게 돈 갚아주고 싶어서 안달 났으면 자살하지 말고 누구한테 맞아 죽을 짓이라도 하던가.자살은 보험금도 안 나와.”
“...”
유라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단지 예란이 처음 면회실에 들어올 때와 다름없이 꼿꼿하게 앉아,살풋 눈을 내리 깔고 있을 뿐이었다.더는 예란에게는 볼일이 없다는 것마냥.그런 그녀에게 예란 또한 용무는 없었기에 별다른 인사 없이 면회실을 나왔다.
단지 사건에 대한 뉴스를 보고 결말을 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과연 그녀는 이런 결말에 만족했을까.
“뭐,가보면 알겠지.”
얼마 전에 수중에 들어온 초대장을 떠올린다.그것을 보냈을 만한 곳은 몇 군데 짐작이 가지만 딱히 어디라고 단정 지을 자신은 없었다.백선교는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넓은 곳이니까.사업에 이용해 먹겠다고 호기롭게 발을 들이기는 했으나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 곳인 것도 알고 있었다.이곳에 그 리스크를 고려할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아-”
잠깐 딴생각을 하던 탓에 맞은 편 복도에서 오던 남자와 어깨를 부딪친 그녀는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바로 서서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꽤 장신인 남자는 웃는 낯으로 예란이 했던 것처럼 가볍게 눈인사하고 그녀가 지나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는 외부인이라면 둘 중 하나다.
가족이거나,변호사거나.
“변호사인가.”
세련된 옷차림이라든지,이쪽의 잘못으로 부딪쳤음에도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이라든지.짧은 시간에 대충 훑어본 내용으로 예란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어쩌면 권유라의 변호사일 수도 있겠다.
만약 그렇다면 꽤 유능해 보이긴 하지만 권유라의 성격상 변호하기란 쉽지 않을 터.약간의 애도를 표하며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교도소를 나섰다.짧게 자리를 비우더라도 사업에는 지장이 없도록 정리해두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