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쓸데없이 길어졌을까.
왜 나는 이런 벌칙로그를 쓰고 있었을까.
원래는 첫사랑 / 첫키스 두개의 벌칙이었으나 같이 썼습니다
이제 정말 로그 다 턴 것 같다....ㅇ<-<
이것은 일부러 박제시켜버린 겨울의 기억.
이른바, 첫사랑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기억의 본보기이다.
“야, 강예란! 또 집에 안 들어갔어?”
먼지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어둠 속에서 간신히 잠들려는 찰나,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형광등의 하얀 불빛에 그녀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신경 쓰지 말라니까 또 오셨네.”
안 쓴지 오래된 구교사의 딱딱하기 그지없는 마룻바닥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켜, 목소리가 들린 교실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명 스위치에 손을 올린 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운동복 차림의 남자는 예란이 예상하고 있던 얼굴이었다. 이 학교에서 자신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명색이 담임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담임이고 뭐고 저한텐 신경 안 써도 돼요. 어차피 4개월만 있으면 졸업이고.”
훅 끼쳐오는 찬바람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목 근처에서 벌어진 담요 끄트머리를 더욱 단단히 쥐었다. 겨울 교복에 겨울용 체육복까지 껴입었건만 난방이 되지 않는 낡은 교실의 밤은 충분히 겨울에 못지않았다.
유성우.
이름은 평범하지만 성까지 붙여 불렀을 때는 독특해지는 풀네임의 남자는 경력 2년 차의 신입 교사로, 신입다운 의욕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 의욕과 활발함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멋지게 보일지는 몰라도 예란에게는 단지 번거로움과 귀찮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적어도 몇 달 전까지는.
“오늘도 엄마가 들어오지 말라셨어?”
“네.”
예란이 대충 먼지만 치우고 누워있던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며 털퍽 앉은 그는 옆구리에 끼고 온 보온병을 내려놓고 그 내용물을 종이컵에 따라 내밀었다.
“뭐예요?”
“추우니까 마시라고 가져왔어. 핫초코야.”
“저 단 거 별로 안 좋아해요.”
“가져온 사람 생각해서 마셔줘라.”
“...그럼 조금만.”
성우가 내민 컵을 치울 기색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별수 없다는 듯 종이컵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입술을 살짝 축일 정도만 마셨음에도 혀끝에 단맛이 길게 남는다. 초콜릿의 단맛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성우가 빤히 쳐다보고 있음을 깨닫고 이내 미간을 폈다.
“언제까지 학교에서 살 거야?”
“...엄마가 빚 다 갚을 때까지요? 아니면 엄마랑 둘이 도망칠 때까지?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고등학교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냥 이번 겨울만이라도 버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빚이 얼마라고 했더라.
이자가 이자를 낳고 낳아 억에 가깝다고 했던 것 같다.
평생 통장에 오천만 원조차도 모아본 적 없는 예란 모녀에게 있어서 억이라는 단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나마도 만져본 적도 없는 돈. 예란의 모친과 1년가량 동거했던 남자가 멋대로 빌려 쓰고 도망간 사채는 반년이 지나도록 모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채를 사채로 돌려막는 것도, 누군가에게 빌리는 것도 한계는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예란의 모친이 벌고 있는 푼돈조차도 입에 풀칠할 돈만 남긴 채 전부 검은 정장의 사내들에게 상납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홀로 입을 꾹 다물고, 수금날이 되면 몰래 학교에서 자는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나마 성우가 예란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언젠가 제 어미를 폭행하던 수금원 사내의 앞을 막아섰던 예란이 대신 맞아 며칠간 학교도 나가지 못한 채 앓아누워있을 때 찾아왔던 그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일이 있고 나서였다.
정말이지 보일 꼴 못 보일 꼴을 다 보인 셈이니 이제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정도는 숨길 정도도 되지 못했다.
“강예란.”
“네?”
“애가 그렇게 어른 얼굴하고 있는 거 아니다.”
“...이제와서 애 취급받는 것도 너무 늦은 것 같은데요. 지금 이쪽은 당장 내일 어디론가 팔려가버릴지도 모르는데?”
농담처럼 피식 웃으며 꺼낸 말은 비현실적으로 무겁다.
매일같이 지속되는 협박.
돈을 갚지 못할 거라면 몸뚱이라도 팔아야 할 거 아니냐느니 어린애가 더 잘 팔린다느니 하는 그런 말들은 이제 폭언 축에도 끼지 못했다.
“쌤도 조심해요. 괜히 저 도와주겠다고 끼어들었다가 얻어터질지도 모르니까.”
보다 못한 성우가 경찰에 신고해준 적도 있었지만 수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지지부진했고 예란 모녀의 일상도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항상 나쁜 날만 있는 건 아니야. 분명 좋은 날도 올 테니까 조금만 참자, 예란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커다란 손.
실제로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모르겠다. 아버지라고 자처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인간이라 고할 수도 없는 파렴치한 이들이었다.
정말이지 자신의 어머니이기는 했으나 어떻게 그렇게 남자 보는 눈이 없는지 예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딸이 어머니의 팔자를 닮는다던가 하는 말은 소름 끼칠 정도로 혐오스럽고 두렵기까지 했다.
기왕 누군가를 만난다면 당신처럼-
“아, 됐어요, 저 잘 거니까 얼른 나가요. 누가 보면 오해하겠네!”
“정말 여기서 자게? 오늘 밤 춥다 그랬는데.”
“그래도 여기가 제일 나아요. 교실에선 늦잠자면 내일 애들한테 들킬지도 모르니까.”
“그럼 이렇게 하자. 오늘 선생님이 숙직이거든.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잘 테니까 숙직실에서 잘래?”
유성우라는 사람은 정말로 상냥하기 그지없어서,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 다정함에 익숙해져 버리면 언젠가 다가올 이별을 두려워하게 될 것을 안다.
“...됐거든요. 아저씨 냄새나서 싫어요.”
“남자는 원래 스물만 넘어도 그런 냄새 나! 아저씨 냄새 아니거든? 총각 냄새라고 해줘.”
“진짜 싫거든요. 아저씨를 총각으로 바꿔봤자 뭐가 달라져요? 냄새나는 건 똑같구만. 저한테 옮을 것 같으니까 쌤 얼른 나가서 숙직이나 서세요.”
“야, 너무하다. 좀 이쁘게 말해주면 어디 덧나냐? 그래, 됐으니까 얼른 자고 내일 조회 전에 들어와라. 추우면 숙직실로 오고.”
“네~네~ 알았으니 얼른 좀 가시죠. 착한 어린이는 잘 시간이니까.”
착한 것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지만.
예란은 그가 나가는 것을 보기도 전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리에 누웠다. 학교 뒤편 분리수거장에서 상자라도 한 개 주워와서 깔아놓을 걸 그랬나 싶을 만큼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나무 바닥 탓에 쉬이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얻어 마신 단 한 모금의 핫 초콜릿에 묘하게 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것만으로도 쌀쌀한 밤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는 눈을 감고, 모든 생각을 접어두기로 한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간에 날은 밝아올 테니 제정신인 상태로 수업을 들으려면 잠은 자두어야 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친구들과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고 수업을 들으며 평범한 열여섯 살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이곳에 예란은 무던히도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있고, 조금이나마 미래를 기대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있는 이 장소가 그저 좋았다.
언젠가 떠나야 할 때가 온다 해도 조금이나마 이곳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그리고 일상의 끝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지독하게 추운 12월의 어느 날.
그토록 예란을 고생시켰던, 그러나 세상 누구보다도 예란을 아껴주었던 모친이 죽었다.
머리에 꽂은 하얀 리본 핀과 장례식장에서 빌린 검은 한복이 낯설기만 했다.
친척 하나, 친구 하나 없었던 모친의 장례식장에는 찾아오는 이조차 없었다. 일부러 학교에는 알리지 않았기에 예란의 친구들이 오는 일도 없었고 조문객이라고 해봐야 어머니가 일하던 식당의 사장과 직원들이 전부였다.
마지막까지 초라하기 그지없는 길.
텅 빈 빈소를 홀로 지키며 날이 어두워지고 더는 방문객도 없겠다 싶을 때쯤 그녀는 모친의 영정 앞에 마주앉았다. 마땅히 사진을 찍은 것도 남아있지 않아 영정사진은 10년도 더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이제 다 괜찮을 거라고 했던 게 이거였어?”
모친이 죽기 며칠 전.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하룻밤만 더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말은 유언이 되었다.
당신 입장에서는 이걸로 지긋지긋한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다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울 겨를조차도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여느 날처럼 수업이 끝나고 귀가한 예란은 수없이 부서지고 깨져 폐허처럼 변해버린 월세 집 방구석에서 차갑게 식은 제 어미의 시신을 발견했다. 심장에 식칼을 꽂은 채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도망치듯 집을 나와 근처 파출소로 달려갔다.
이상할 정도로 이성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 일은 남의 일을 구경하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오죽하면 처음 신고받은 경찰이 그녀를 살인범으로 의심하기까지 했을까.
“예란아!”
요 며칠간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와중,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빈소 입구에 서 있는 이는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선생님.”
새까만 정장은 평소 학교에서 입는 일이 드물어 낯설었지만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평소에도 저렇게 입으면 좋을 텐데. 급하게 달려왔는지 한겨울임에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그를 향해, 예란은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이렇게 급하게 오실 필요 없었는데요. 어차피 죽은 사람은 어디 가지 않으니까.”
혹시라도 예란이 울까 봐 누군가가 쥐여주고 간 티슈를 꺼내 성우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학교에는 모친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지만 단 한 사람, 성우에게만은 짧은 통화로 빈소의 위치를 알려준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에 대한,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자신을 아껴주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다른 친척들은?”
“...저는 괜찮고, 사연은 말하자면 길어요. 오신 김에 절이나 한번 해주실래요? 보시는 것처럼 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아.. 그래, 그래야지... 급하게 오느라 빈손으로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국화꽃이라도 사올 걸 그랬구나..”
그 흔한 근조 화환 하나 없는 빈소를 둘러본 그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는 됐다며 손사래를 치고 옆으로 비켜섰다.
정중하게 영정 앞에 절을 한 후, 묵념이라도 하는 것마냥 잠시 그 앞에 서 있던 성우는 다시 예란에게 다가와 그녀의 두 손을 그러모아 쥐었다.
“어떻게 된 거니?”
“자살이래요. 부검도 해보고 경찰들도 조사했는데 타살로 위장한 자살이라나. 보험금을 노린 자살이라고. 그렇대요.”
덤덤하게 말한다고 말한 목소리가 기묘하게 가라앉아 갈라진 채 떨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아닌 남의 목소리인 것 같아서 심하게 낯설었다.
“당연히 보험금은 못 받을 거고. 정말이지, 끝까지 하나도 도움 안 되는 아줌마라니까. 나라도 어떻게 벗어나게 해주려고 했거든 제대로 죽었어야지. 정말...정말....!!”
미워 죽겠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서 입술만 씹고 있으니 잠자고 듣고 있던 그가 가까이 다가와 말없이 예란을 제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저도 모르게 밀어내려 했지만 여자아이의 힘으로 성인남성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참느라 수고했다. 지금은 그렇게 참지 않아도 되니까 소리 내서 울어도 돼. 넌 아직 열여섯 살이잖아, 예란아. 응석 부려도 되고, 투덜대도 돼. 아직 어른인 척할 필요 없어.”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눌러놓았던 것들이 단번에 터져 나오며 제 목에서 저도 처음 들어보는, 비명에 가까운 통곡이 쏟아졌다.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듯 다리에 힘이 풀려, 자신을 안은 단단한 몸을 붙잡고 한참을 매달려 제 속을 게워내듯 오열했다.
누군가에게 몸을 맡기고 울어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요, 멀리 지방에 계신 친척한테 가기로 했어요. 역시 혼자 살 수는 없으니까. 그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때는 2월.
봄방학에 들어가기 직전의 어느 날.
자퇴서를 내고 본격적으로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학교 상담실에 성우와 마주앉았다. 테이블 건너편의 그는 어쩐지 예란보다 더욱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렇게까지 걱정해줄 필요 없었는데.
모친의 장례식 이후 두어 달간, 예란을 찾는 사채업자들로부터 그녀를 제집에 숨겨준 것은 성우였다. 어떻게든 그녀를 감춰주려고 참으로 애를 썼더랬다. 혹시 어디서라도 수금원을 빙자한 깡패들이 들이닥칠까 신경 쓰던 그는 아직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눈에 띄게 말라있었다. 매일 보는 얼굴임에도, 참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저 가고 나면 살 좀 다시 찌우세요. 보기 안 좋아요.”
“예란아. 정말 괜찮은 거야? 그 친척은 정말 믿을만해?”
“안 괜찮을 게 뭐 있어요. 어떻게든 친척하고 연락 닿은 게 다행이잖아요. 다시 서울 올라오긴 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서울에 있을 때보다는 추적을 피하기도 쉬울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그녀는 그를 향해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는지 성우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럼 일어날게요. 날 어두워지기 전에 시외버스 타러 갈 거니까요.”
“터미널까지 바래다줄게”
“아니요, 괜찮아요. 그 전에 조금 정리할 일도 있고.. 그쪽으로 친척이 마중 올 거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예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서 걷기 시작했다.
전부 거짓말이지만.
그녀를 돌봐줄 친척이 있다는 것도, 지방으로 간다는 것도 전부 거짓말이었다.
그의 옆에 머무를수록 그에게 좋지 않은 영향만 끼칠 것을 깨달은 예란은 그에게 거짓으로 안심시킨 후 홀로 추적을 피하기로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그녀가 거짓말을 함으로써 성우에게서 멀어진다면 이제 그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고, 숨통이 트일 테니까.
하지만 거짓말을 하나 했으니 하나쯤은 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겠지.
“저기, 선생님.”
“...뭐 할 말 있어?”
“선생님 이름요. 참 좋아했어요.”
“이름?”
“유성우가 내리는 밤에는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든가 뭐 그런 얘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좋아했어요. 선생님 옆에 있으면 내가 바라는 뭔가가 이루어질 것 같아서.”
“...”
“그리고 정말로 이뤄졌어요. 이번 겨울을 버텼잖아요?”
- 그냥 이번 겨울만이라도 버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소박한 소원은 결국 이루어졌고, 어떻게든 살아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어준 것은 그였다.
“두 달간 선생님.. 아니, 성우 씨는 힘들었겠지만 전.. 정말 행복했어요. 그래서 고마워요.”
“예란아.. 너..”
“자퇴서도 냈으니 학생도 아니고, 마지막이니까 딱 한 번만 모른 척 해주세요.”
크게 심호흡하고 돌아서서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예상대로 당황한 그의 얼굴은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무어라 특정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좋아했어요. 나이 차도, 입장도 전부 떠나서 그냥 좋아했어요. 물론 성우 씨는 그런 거 아니었겠지만 전 그랬어요.”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얼굴로 피가 몰려 달아오르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지만 말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그가 예란의 진심을 듣고 대답할 말을 고르느라 머뭇거리는 찰나, 그의 옷깃을 잡아내려 눈높이를 억지로 맞췄다. 체구 차는 많이 나지만 최근 들어 마른 데다 방심하고 있었던 탓에 그는 뜻밖에도 쉽게 예란의 눈앞까지 내려왔다.
보편적으로 잘생긴 축에 속하는 얼굴. 단정하고, 상냥한 인상. 다시는 보지 못할 그 얼굴을 찰나의 순간에 기억 속에 새겨 넣고, 조심스레 다가가 입술을 부딪쳤다.
실제로 입술을 맞댄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으나 그 순간만은 한없이 길게만 느껴져서 멋대로 일을 저지른 자신조차도 무슨 정신으로 그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키스라기에는 너무나 미숙한, 그저 입술을 대기만 했을 뿐인 행위였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자신의 첫사랑이었으며, 첫 키스였다 .
그 날 이후 겪은 일들은 죽어도 첫 경험으로 치고 싶지 않은 일들뿐이었기에.
그에게 그렇게 고백 아닌 고백을 저지르고 그와 이별한 날, 예란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수금원들에게 붙잡혀 만신창이가 된 채 업소로 내던져졌다.
화장으로 나이를 애매하게 감추고, 익숙지 않은 높은 구두와 짧기만 한 옷을 걸친 채, 처음 보는 사내들에게 아양을 떨며 몸을 내어줘야 하는 현실을 대면한 그녀는 몇 번인가는 자살 시도를 하고, 몇 번인가는 무작정 탈출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
돌아오는 것은 무자비한 폭행뿐이었지만.
그런 나날들도 전부 지나가고 지금에 와서는, 첫사랑이었던 그에 대한 추억은 오래된 사진첩에 꽂혀있는 낡은 사진과 같은 추억과 다를 바 없었다. 살아가다 잠시 숨을 돌릴 필요가 있을 때면 꺼내보는 그런 추억.
얼마 전엔가는 그의 근황이 궁금하여 알아본 일도 있었다.
시골 촌구석에 틀어박혀 빚을 회피하는 채무자도 찾아내는 판에 평범하게 살아가는 교사를 찾아내는 일은 그녀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근 십 오 년 만에 들은 그의 소식은, 제자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그 사람다워서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익명으로 치료비를 계산하고 쾌유를 기원하는 과일바구니를 보냈을 뿐, 그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예란은 죽을 때까지 그를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미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느니 그의 기억 속에 멋대로 입술을 빼앗은 당돌한 열여섯 살 여자애로 남는 것이 나았다.
그 겨울의 기억은 곱게 말린 꽃처럼 빛바랜 그대로 두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터. 첫사랑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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