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십만 원짜리 양주와 3천 원짜리 소주를 두고 고르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자를 고르겠다. 가격으로 보나 풍미로 보나 그녀의 취향은 그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강남의 고급 바만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달달한 칵테일도, 향긋한 와인도, 쌉싸래한 위스키도 가리지 않고 좋아했지만 가끔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금요일 밤에는 파전에 소주 한 병이 절실히 생각나는 것은 주당이라면 당연한 이치라고 그녀는 스스로 납득했다. 바삭바삭하게 지진 파전을 젓가락으로 쭉 찢어 포차 주인이 직접 신경 쓴다는 간장을 살짝 찍어 한 입 물고, 아침이슬마냥 맑은 소주 한 잔을 단번에 목구멍에 툭 털어 넣으면 소소하게나마 속에서 단단하게 뭉쳐있던 것의 표면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이를 테면 짜증이라던가, 스트레스같은 마이너스한 감정이 뭉쳐 굳어진 결정체와 같은 것이다. 그녀는 종종 그것을 알코올기운을 빌어 녹여내고는 했다. 잔 주둥이에 살짝 묻어난 붉은 립스틱을 엄지 끝으로 비벼 지우며, 어쩌면 이러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 더이상 돈에 쪼들리지도 않고,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서른이 되기 이전에 이미 이루었으며 딱히 바라는 것도 없으니 이 얼마나 성공한 인생인가.
“오랜만에 오셨네, 요즘 바쁘셨나봐.”
젓가락질도 멈추고 멍하게 있으려니 온화한 인상의 여주인이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햇수로 근 7년은 알고 지낸 사이이니 그녀의 직업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 웃는 낯으로 대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쪽 일이 다 그렇죠 뭐. 이모님은 요즘 어때요?” “여기야 다를 게 뭐 있나. 먹는장사야 항상 뻔하지.” “바깥 천막에 앉은 우리 애들 테이블도 잘 좀 챙겨주세요. 모자라면 말씀 하시구.”
지갑에서 하얀 수표 두어 장을 꺼내 깔끔하게 서명하고 주름 진 손에 쥐어주며 사근사근 웃으니 여주인의 젊은 아들이 재빠르게 꼬치구이니 모듬전이니 하는 음식들을 몇 접시 챙겨 밖으로 내어갔다.
“저분들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않구.” “인상 나쁜 정장 셋이 들어와 있으면 다른 손님들이 무서워하잖아요. 조금만 신세 지고 일어날게요.”
어차피 많이 마실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목만 축일 수 있는 정도면 족했고, 그녀가 이곳에서 장사를 방해할 만큼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는 주인도 딱히 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단지 맛있게 먹으라는 주인의 말과 함께 파전만 올라와있던 테이블에 돼지껍데기와 오뎅탕이 놓였을 뿐이다.
“혼자 먹긴 좀 많은데.”
그렇다고 부를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아무런 사심 없이 술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는 손에 꼽을 수가 없었다.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저 말없이 잔을 채우고, 그것을 비운다.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서, 저 혼자 움직일 만큼 사정이 어느 정도 나아졌을 무렵부터 지금까지도 종종 오던 곳이었다. 꽤 잘 되는 집임에도 낡은 천막이나 볼품없는 플라스틱 간이의자들도 바뀐 것이 별로 없었다. 시간이 흘러 주인과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하게 변한 것이 없는 이 포차를 그녀는 좋아했다. 비닐 천막을 가볍게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기분 좋게 취한 사내들이 저들끼리 떠들어대며 와하하 웃는 소리. 실연이라도 당한 모양인지 눈이 퉁퉁 부어 술잔을 기울이는 여자가 맞은편에 앉은 친구에게 신세 한탄하는 소리. 그야말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풍경이야말로 서울바닥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악명 높은 사채업자 강예란이 좋아하는 안주거리였다. 눈도, 입도 즐거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