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테이블에 놓인 것은 블루마블과 비슷한 류의 게임판과 사람 수만큼의 말, 그리고 주사위 두개. 딱히 게임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전적으로 주사위 눈의 수에 달린 게임이다. 먼저 들어가면 장땡이라는 말이지? 그다지 크지도 않은 백색의 주사위 두개를 가볍게 손바닥 안에서 굴려보았다. 플라스틱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나쁘지 않다. 운을 시험하는 게임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2라운드의 실패를 만회하지 않으면. 수중에 있는 페이지는 한 장.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봐도 트레이드는 조금 번거로워질지 모르는 팀 조합이지만 아무래도 좋다.
“지는 건 싫으니까.”
게다가 운을 시험한다면, 이 쪽도 절대로 약한 운은 아니라고 자신한다. 유일한 문제는 팀경기라는 걸까. 그렇지만 이 게임에 작전구상같은 것은 의미가 없으니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게임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하얀 주사위가 테이블 위를 경쾌하게 굴렀다.
02.
1승 1패라. 나쁘진 않지만 좋을 것도 없다. 지난 판에서 악운이 낀 여자를 흘끗 보았지만 딱히 표정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사, 전적으로 주사위에 달린 게임이니 저 여자의 잘못은 아니지. 후, 릴렉스, 릴렉스. 습관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수차례. 깊게 심호흡을 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주사위를 다시 집어 들었다. 여전히 같은 무게. 이딴 주사위가 대체 뭐라고 이렇게 간절하게 매달린단 말인가. 애들이나 할 법한 게임에 스물, 서른을 넘긴 남녀가 매달려 진지하게 주사위를 던진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나 자신 또한 그 무리중 하나임은 알고 있다. 그러니 바라는 것은 내게 운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이들에게도 동일한 운이 함께 하기를. 그것뿐이다.
03.
놀랍게도 무인도로 인한 강제 휴식 없음.
럭키하게도 사다리와 전진의 은혜를 입어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탈출한 예란은 손에 턱을 괸 채 물끄러미 게임판을 보았다. 상황이 좋지는 않은데. 긴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릴 때마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난다. 허나 주사위 굴리는 소리에 묻혀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마지막까지 주사위 운이 터진 예란과 달리 팀원들의 주사위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정말이지 운을 기대하는 건 지긋지긋해. 테이블을 엎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으나 다음번에는 괜찮으리라는 믿음으로 꾹 눌러 참으며 팀원들의 주사위를 주시한다.
“오..!”
작게 탄성을 터뜨린 도윤의 주사위는 5와 6. 다음 턴쯤엔 탈출할 수 있겠지. 혜원 또한 상당히 진행 속도가 빨라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뒤쳐진 송화와 시아가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저쪽 팀도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다.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될지도 몰라. 굳이 비유하자면 야구경기 9회말 동점 2사 만루정도 될까. 승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두고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 긍정적인 사고 같은 것은 별로 취향에 맞지 않지만 딱히 손을 놓고 패배를 예견하기보다는 이겨서 페이지를 배당받을 몇 시간 후를 그린다.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시나리오는 수정하면 그만인 것을. 다음 라운드의 적이 될 지라도 지금은 동지인 이상, 예란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한 가지 숫자만을 바랐다. 그거야, 당연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