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건 필시 꿈이다. 암, 그렇고말고. 예란은 홀로 그렇게 납득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주방에서 사슬적이랑 육원적 꿍쳐둔 것을 조금 가져왔으니 좀 드셔보시게. 약주도 한 잔 쭉 들이키시고. 강 별감 생각해서 특별히 마련한 상이니 남김없이 먹어야 할 것이야.”
옥색 저고리의 하얀 끝동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는 이의 눈웃음은 퍽 자연스러웠으나 그 낮은 목소리는 엄연히 사내의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소반을 들고 있는 단단한 손은 척 봐도 여성의 것은 아니니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할지 도대체가 모르겠다. 게다가 얼굴을 확인하려드니 키는 한 뼘 가까이 차이가 났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분명히 아는 얼굴이다.
머리에는 붉은 댕기 비슷한 것을 달고 옥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갖춰 입은 모습은 그럴싸한 조선시대 나인 복장의 표본이었으나, 문제는 저 치가 남자라는 사실이 최대의 문제였다.
“팔 떨어지겠구나, 어디라도 좀 앉아야겠다. 지금이라면 온 궁궐에 술판이 벌어졌으니 별감이 조금 땡땡이친다고 해서 뭐라 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야.” “....온 궁궐...? 술판..?”
그러고 보니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을 무렵 멍치고 있다가 누군가가 부른다는 얘기에 어영부영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오는 길에 지나쳤던 어느 누각에서 부어라 마셔라 지화자 좋다~ 하는 흥에 겨운 낯익은 목소리와 거문고인지 가야금인지 신나게 깽깽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자자, 얼른 오시게.”
그 특유의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으로 앞장서는 진주를 따라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니 대충 멍석 비슷한 것이 깔린 구석에 털퍽 앉아 상을 내려놓자마자 어디에 쟁여왔는지 모를 술병 댓개를 주르륵 깔아놓는다.
“높으신 마마님들처럼 수십 첩짜리 주안상은 아니어도 퍽 괜찮지 않겠는가.”
깔깔 웃으며 눈처럼 하얀 백자 잔에 말간 액체를 찰랑이게 채워 내미는 것을 얼결에 받아 쭉 들이켰다.
“?!”
술 깨나 마신다는 예란조차도 제법 훅하게 식도를 달구는 맛이 상당히 도수가 높은 듯 했다. 최소한 40.. 아니 60도는 될지도 모르겠다. 작지도 않은 술병 댓개가 전부 이딴 술인가. 아니 애초에 꿈인데 술맛은 왜 이리 생생하단 말인가. 미쳤나봐.
“속이 상하니 사슬적도 한 점 드시고.”
속 걱정 해줄 거면 아예 먹이질 말던가.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 진주가 젓가락으로 집어 들이댄 고기 전 하나가 반쯤 억지로 입에 쑤셔 넣어졌다. 목에 걸려 질식사 하고 싶지는 않으니 얌전히 씹는다만 여전히 이성과 몸이 제법 따로 노는 꼴이 정신사납기 그지없었다. 고기를 다 씹어 넘기는가 하면 눈 앞에 가득 채운 술잔이 들이대지고, 또 그걸 받아 마시면 뭔가 안주거리가 들어온다. 어떻게 좀 거절해볼까 하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싫어? 남길거야? 술인데?’ 하고 이상하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일단 곧이곧대로 받아먹을 수 밖에 없었다. 평소 주량이 작지는 않지만 제가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해서 달리는데다 예란의 특기 중 특기인 ‘내가 한 잔 마실 때 남에게 두 잔 주기’를 시전하면 제가 먼저 쓰러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허나 이렇게 무방비하게, 상대는 술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일방적으로 꾸역꾸역 받아먹는 일은 또 처음이어서 어떻게 대처를 할라야 할 수가 없었다. 한 잔, 두 잔, 세 잔- 끝없이 밀려드는 독주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싹싹하게 챙기는 진주의 페이스에 예란은 그대로 휘말려버렸다.